
마트에서 사 온 사과가 기대와 달리 푸석하고 밍밍할 때,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옵니다. 버리자니 아깝고 그냥 먹기엔 식감이 영 아쉬운 그 애매한 상황. 저도 그런 사과를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파이를 만들었는데, 팬 위에서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층층이 결이 살아있는 반죽과 달콤한 사과 필링이 만나면, 생으로 먹을 땐 미처 몰랐던 사과의 매력이 완전히 다른 얼굴로 드러납니다.
속반죽이 파이 결을 만든다
파이를 처음 만들어보는 분들이 가장 많이 간과하는 부분이 바로 속반죽입니다. 일반적으로 반죽은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제가 직접 만들어봤더니 겉반죽과 속반죽을 따로 준비하는 이 두 겹 구조가 파이의 결을 완전히 결정짓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속반죽은 실온에 미리 꺼내둔 무염 버터 36g에 소금 세 꼬집을 넣고 밀가루와 함께 으깨듯이 섞어 만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지율(fat ratio)입니다. 유지율이란 반죽 전체 무게 대비 버터 같은 유지 성분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하는데, 이 비율이 높을수록 반죽이 구워졌을 때 층이 선명하게 벌어집니다. 날가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완전히 섞어 하나의 덩어리로 만드는 것이 핵심인데, 이 단계를 서두르면 나중에 반죽이 균일하게 펴지지 않습니다.
완성된 겉반죽과 속반죽은 나란히 두고 30분간 휴지시킵니다. 휴지(resting)란 반죽 안의 글루텐 조직이 이완되고 수분이 고르게 퍼지도록 두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 시간을 건너뛰고 바로 밀면 반죽이 자꾸 수축해서 얇게 펴기가 어렵습니다. 제 경험상 이 30분이 이후 성형 작업의 난이도를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 속반죽 재료: 실온 무염 버터 36g, 소금 세 꼬집, 밀가루 적량
- 날가루 없이 한 덩어리가 될 때까지 충분히 섞을 것
- 겉반죽과 속반죽 모두 반드시 30분 휴지 후 사용
사과 필링, 재료 순서가 맛을 바꾼다
사과 220g을 작게 썰어 버터 15g을 녹인 팬에 넣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꿀 28g과 설탕 16g을 함께 쓰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설탕만 써도 충분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꿀을 함께 쓰면 단맛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꿀에 포함된 과당(fructose)이 단순 설탕보다 낮은 온도에서 캐러멜화되기 때문에 사과의 풍미를 더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수분이 충분히 올라왔을 때 시나몬 가루 3g을 넣는 타이밍도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시나몬을 넣으면 향이 날아가버리고, 너무 늦게 넣으면 풍미가 균일하게 배어들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건 처음엔 예상 밖이었습니다. 시나몬을 언제 넣느냐에 따라 향의 강도가 이렇게 차이 날 줄은 몰랐습니다.
마지막에 전분 가루 6g을 넣어 농도를 잡아줍니다. 전분 가루는 가열하면 호화(gelatinization)가 일어나 액체를 걸쭉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필링이 반죽 안에서 흘러내리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역할입니다. 이 단계를 빠뜨리면 구울 때 필링이 새어 나와 반죽이 눅눅해질 수 있으니, 농도를 보면서 졸여내는 것이 좋습니다. 완성된 필링은 완전히 식혀서 사용해야 반죽이 열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반죽 성형, 공기 한 점 없어야 층이 산다
휴지를 마친 반죽을 5등분해 둥글게 굴린 뒤 랩을 씌워 건조를 막아줍니다. 겉반죽을 넓게 펴서 가장자리를 얇게 만든 다음 그 안에 속반죽을 넣고 감쌉니다. 이때 선물 포장하듯 꼼꼼하게 접으면서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완전히 밀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처음 만들 때 이 단계를 대충 했다가 반죽 사이에 공기 주머니가 생겨 구운 후에 표면이 울퉁불퉁해진 경험이 있습니다.
봉합한 반죽을 약 1mm 두께로 얇게 밀어주는 과정이 그다음입니다. 이를 납작하게 접어 다시 밀어주는 동작을 반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층 밀기, 즉 라미네이션(lamination)입니다. 라미네이션이란 반죽과 유지를 겹겹이 접어가며 층을 만드는 기법으로,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구웠을 때 껍질이 얇게 갈라지며 파삭한 식감이 완성됩니다. 접고 미는 방향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결이 고르게 생깁니다.
2등분 한 반죽은 한 방향으로 펼쳐 결이 살도록 잡아줍니다. 이후 준비한 사과 필링을 적당량 채우고 입구를 꼼꼼하게 꼬집어 봉합합니다. 필링을 너무 많이 넣으면 아무리 잘 봉해도 구울 때 새어 나오기 때문에, 제 경험상 처음엔 조금 아쉬울 만큼 넣는 편이 오히려 실패 없이 깔끔하게 완성됩니다.
팬 굽기, 불 조절이 전부다
오븐이 없어도 된다는 게 이 레시피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팬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단, 불 조절에서 성패가 갈립니다. 일반적으로 빠르게 익히려면 중불 이상이 낫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는 반드시 약불을 권합니다. 약불에서 천천히 구워야 속 필링까지 고르게 익으면서 겉면이 타지 않습니다.
마이야르 반응(Maillard reaction)이라는 개념을 알고 나면 불 조절의 이유가 더 명확해집니다. 마이야르 반응이란 열에 의해 단백질과 당이 결합하며 갈색으로 변하고 특유의 구수한 향이 생기는 화학 반응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 반응이 너무 강한 불에서는 속이 익기도 전에 겉이 먼저 타버린다는 점입니다. 약불에서 서두르지 않고 구워야 노릇한 색과 풍미가 함께 완성됩니다(출처: Food Science Institute).
다 구워진 사과파이를 뒤집거나 꺼낼 때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바삭하고 파삭한, 그 경쾌한 소리가 나면 제대로 완성된 겁니다. 사과의 수분이 필링 안에 적당히 남아 있으면서 반죽 층은 바삭하게 마무리되는 이 균형이, 팬파이가 오븐 파이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식품영양학적으로도 사과에 포함된 펙틴(pectin)은 가열하면 부드럽게 변하면서 특유의 진한 단맛을 끌어올리는데, 약불에서 천천히 조리할수록 이 변화가 이상적으로 일어납니다(출처: 농촌진흥청).
자주 묻는 질문
Q. 푸석한 사과로 만들어도 맛있게 나오나요?
A. 오히려 이 레시피가 더 잘 어울립니다. 일반적으로 생으로 먹기 좋은 아삭한 사과가 요리에도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제 경험상 조금 물러진 사과는 필링을 만들 때 수분이 더 잘 나와 졸이는 과정이 수월합니다. 버터와 꿀, 시나몬이 부족한 단맛을 충분히 보완해줘서 완성된 맛에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Q. 전분 가루를 꼭 넣어야 하나요?
A. 생략하면 필링이 묽어져서 반죽 안에서 새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분 가루의 역할은 호화를 통해 필링의 점도를 잡아주는 것인데, 이 단계를 빠뜨리면 겉반죽이 눅눅해지고 파삭한 식감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콘스타치나 감자 전분으로 대체해도 결과는 비슷합니다.
Q. 반죽 휴지를 꼭 30분 해야 하나요?
A. 짧게 하면 반죽이 밀 때마다 수축해서 얇게 펴기가 상당히 힘들어집니다. 글루텐이 이완되는 데 최소 20~30분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제가 직접 15분으로 줄여봤더니 반죽이 탄력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역력히 차이가 났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냉장고에서 조금 더 두는 방법도 있습니다.
Q. 팬에 기름을 따로 둘러야 하나요?
A. 반죽 자체에 버터가 들어 있어서 별도로 기름을 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단, 프라이팬 코팅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코팅이 낡은 팬이라면 약간 두르는 편이 안전합니다. 처음 구울 때 약불로 예열한 팬에 바로 올리는 것이 눌어붙음을 방지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결론
이 사과파이 레시피를 처음 만들어본 뒤 가장 놀랐던 건 복잡한 도구가 하나도 필요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오븐도, 틀도 없이 팬 하나로 이만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상태가 좋은 사과로 만들면 더 진한 과즙이 살아있고, 푸석한 사과로 만들어도 버터와 꿀, 시나몬의 조합이 그 부족함을 메워줍니다.
속반죽의 라미네이션 구조, 전분 호화로 잡은 필링 농도, 약불에서 끌어낸 마이야르 반응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으면 반죽을 꺼낼 때 들리는 그 파삭한 소리가 모든 수고를 보상해줍니다. 처음이라면 성형에서 약간 어색할 수 있는데, 두 번째부터는 손이 기억합니다. 냉장고에 잠든 사과가 있다면 바로 도전해보시길 권합니다.